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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고군분투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
  •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7-05-08

 

시민들의 고군분투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인 제헌국회는 1948년 설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는 언제 설립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최초의 제헌국회보다 50년이나 앞선 1898년 설립되었는데요. 더 놀라운 사실은 최초의 의회 설립의 뒷 배경엔 시민들의 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1948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의회인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 전인 
1898년,
이 땅에 최초의 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시민들의 고군분투가 있었음을 
알고 계신가요
1890년대 후반,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열강의 침략행위로 인해 
대한제국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주권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예로 1898년 1월 21일,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에 
석탄기지 설치를 요구하며 수병을 상륙시켜 
무력시위를 감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압박에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승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많은 시민과 
지식인들이 반발했습니다.
* 조차: 타국의 영토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통치하는 일
이에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절영도 조차 반대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였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외국인들조차 놀라움을 표시할 정도로 
시민들의 민중의식은 성장해 있었고,
이를 목격한 정부는 거세지는 여론에 따라 
절영도 조차를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만민공동회 개최는 한마디로,
“시민의 힘으로 국권 침탈을 막은 사건”
이었습니다.
이를 지켜 본 독립협회는 
정부의 독단으로 국권이 침탈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
즉, 의회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法 법 國 국 民 민 變 변
친러수구파들이 프랑스혁명을 이르던 말로,
이들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던 
프랑스혁명에 빗대어 
민변(民變), 즉 변고로 규정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의회를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하고 
상원을 먼저 설립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국가에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상원의 경우 정부 측에서도 일정 인원을 임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하원은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한 후
의회정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전국에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설립할 계획이었습니다.
약 6개월 동안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의회설립운동을 반대하던 수구파가 실각하고
개혁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입니다.
1898년 9월 12일, 
김홍륙 등이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커피에 독을 탄 역모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구파들은 이를 계기로 ‘연좌법’을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연좌법이란 죄인의 가족 등을 죄인과 같이 처벌하는 제도로써 
1894년 갑오경장 당시에, 무고한 자들을 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케 하는 악법으로 보아 폐지되었던 것입니다.
독립협회는 연좌법 부활 저지운동을 벌였고 
시민들은 독립협회를 지지하였습니다.
 5일간의 철야상소 끝에 연좌법 부활은 저지되었고 
이를 주도하던 수구파 대신들이 실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들이 물러난 자리에
친 독립협회 관료들을 기용하여 개혁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즉시 개혁정부와 의회설립 협의를 시작했고,
총 상원 의원 50명 중 25명은 정부 지명 의원, 
25명은 민선 의원(간선제) 로 구성하는 안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합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 오후 1시, 
서울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관민공동회에는 정부 대신부터 시민, 학생, 승려, 백정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1만 여명 가까이 참여하여 
의회 설립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1898년 11월 4일,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하는 
중추원신관제가 공포되었습니다.
한국이 역사상 최초로 제정한 
의회설립법이었습니다.
입법권, 조약비준권, 심의권을 가진 
중추원은 각국 공사들에 의해
半 반 下院 하원, 일종의 국민회의로
본국에 보고될 정도로
당시에는 선진적인 의회였습니다.
시민들은 11월 5일에 치러질 
중추원 민선의원선거를 앞두고
의회 정치 실현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꿈은 성사 직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1월 4일 밤, 시내 곳곳에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우려는 모략’이라는
익명서가 살포되었던 것입니다.
격분한 고종황제는 독립협회 간부들의 체포를 명령했고,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익명서 살포를 주도한 수구파 세력들은 
정부에서 개혁파들을 몰아냈고
독립협회 및 개혁파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지난 밤 벌어진 참담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울분에 북받쳐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시민들은 11월의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도
독립협회 인사들의 석방과 독립협회의 복설,
익명서 조작에 관여한 수구파 처벌을 요구하며 
더욱 의기를 불태웠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이들을 위해 의연금을 보내왔고,
수구파의 명령을 받아 파수를 보던 군인들까지도
만민공동회에 대한 포위를 풀고 돌아가 버렸으며
해산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정부의 모략에 개탄하며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습니다.
만민공동회 17일째인 1898년 11월 21일,
수구파 세력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합니다.
“만민공동회를 쳐부수자!!!”
종로에 모여 있던 2천 여명의 보부상들이 
일제히 몽둥이로 무장하고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는 인화문으로 향했습니다.
찬 비에 17일 연일 철야시위를 하던 만민공동회 군중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수구파와 보부상들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인과 경무청의 순검들마저 
대부분이 만민공동회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복설을 승인했고 
친히 칙어를 내려 의회설립의 추진, 
보부상의 해산을 약속하며
만민공동회를 자진해산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시민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개혁과 수구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황제에게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와 수구파 대신들은
군대를 통한 강제 해산을 건의하였습니다.
1898년 12월 23일, 
결국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만민공동회 인원들을 포위하고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 해산을 단행하였습니다. 
이틀 후인 12월 25일,
황제가 칙어로써 
만민공동회의 11개 죄목을 열거하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공식적인 불법단체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시민들과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을 지켜본 후배들에게는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일깨워준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는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도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할 역량과 의지가 있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외세에 의해 도입된 것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선조들의 끊임없는 
열망과 외침을 통해 이룩된 것이었습니다. 

 

 

<홍성군선거관리위원회 김덕준>

1948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의회인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 전인 1898년 이땅에 최초의 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시민들의 고군분투가 있었음을 알고계신가요 ?

1890년 후반,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열강의 침략행위로 인해 대한제국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주권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 출처 :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

그 예로 1898년 1월 21일,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에 석탄기지 설치를 요구하며 수병을 상륙시켜 무력시위를 감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압박에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좇차를 승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많은 시민과 지식인들이 반발했습니다.

* 조차 : 타국의 영토 일부를 빌려 일정기간 통치하는 일

사진 : 1930년대 절영도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에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절영도 조차 반대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였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절영도 조차 반대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였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자주독ㅇ립을 외쳤습니다.

외국인들조차 놀라움을 표시할 정도로 시민들의 민중의식은 성장해 있었고, 이를 목격한 정부는 거세지는 여론에 따라 절영도 조차를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진 : 만민공동회 개최 장면

출처 : 우리역사넷

만민공동회 개최는 한마디로, "시민의 힘으로 국권 침탈을 막은 사건"

이었습니다.

이를 지켜 본 독립협회는 정부의 독단으로 국권이 침탈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 즉, 의회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국회의사당 제1회의장

출처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법국민변

친러수구파들이 프랑스혁명을 이르던 말로, 이들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던 프랑스혁명에 빗대어 민변, 즉 변고로 규정하였습니다.

사진 :경운궁(현 덕수궁)일곽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협회는 이러한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의회를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하고 상원을 먼저 섭립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대ㅐ부분의 국가에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상원의 경우 정부 측에서도 일정 인원을 임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하원은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한 후 의회정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전국에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설립할 계획이었습니다.

약6개월 동안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의회설립운동을 반대하던 수구파가 실각하고 개혁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입니다.

사진:독립신문 4.30.서재필 논설

출처:Bigkind.or.kr

1898년9월12일, 김홍륙 등이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커피에 독을 탄 역모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구파들은 이를 계기로 '연좌법'을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연좌법이란 죄인의 가족 등을 죄인과 같이 처벌하는 제도로써 1894년 갑오경장 당시에, 무고한 자들을 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케 하는 악법으로 보아폐지되었던 것입니다.

독립협회는 연좌법 부활 저지운동을 벌였고 시민들은 독립협회를 지지하였습니다.

5이간의 철야상소 끝에 연좌법 부할은 저지되었고 이를 주도하던 수구파 대신들이 실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진출처 : 영화 '가비'중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들이 물러나 ㄴ자리에 친 독립협회 관료들을 기용하여 개혁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즉시 개혁정부와 의회설립 협의를 시작했고,

총 상원의원50명 중 25명은 정부지명 의원,

25명은 민선 의원(간선제)로 구성하는 안을 얻어내 수 있었습니다.

이 합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 오후 1시, 서울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관민공동회에는 정부 대신부터 시민, 학생, 승려, 백정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1만 여명 가까이 참여하여 의회 설립을 향한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림:만민공동회 출처:독립기념관

이로써1898년11월4일,

충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하는 중추원신관제가 공포되었습니다.

한국이 역사상 최초로 제정한 의회설립법이었습니다.

사진:추추원 관제 개정 문건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이들의 꿈은 성사 직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1월4일 밤, 시내 곳곳에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우려는 모략'이라는 익명서가 살포되었던 것입니다.

격분한 고종황제는 독립협회 간부들의 체포를 명령했고,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익명서 살포를 주도한 수구파 세력들은 정부에서 개혁파들을 몰아냈고 독립협회 및 개혁파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사진:익명서 이미지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시민들은 지난 밤 벌어진 참담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울분에 북받쳐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시위에 나섰습니다.

시민들은 11월의 차가운 비를 ?으면서도 독립협회 인사들의 석방과 독립협회의 복설, 익명서 조작에 관여한 수구파 처벌을 요구하며 더욱의기를 불태웠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이들을 위해 의연금을 보내왔고, 수구파의 명령을 받아 파수를 보던 군인들까지도 만민공동회에 대한 포위르 ㄹ풀고 돌아가 버렸으며 해산명령을 받고 나온 한성부 관리들까지도 정부의 모략에 개탄하며 만민공동회에 동정을 표시했습니다.

출처 : pixabay

만민공동회 17일째인 1898년 11월21일.

수구파 세력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합니다.

"만민공동회를 쳐부수자!!!"

종로에 모여 있던 2천 여명의 보부상들이 일제히 몽둥이로 무장하고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는 인화문으로 향했습니다.

찬 비에17일 연일 철야시위를 하던 만민공동회 군중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사진: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충돌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수구파와 보부상들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나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인과 경무청의 순검들마저 대부분이 만민공동회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복설을 승인했고 친히 칙어를 내려 의회설립의 추친 보부상의 해산을 약속하며 만민공동회를 자진해산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시민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 경운궁 앞 집회 장면

출처:구글 검색

개혁과 수구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황제에게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와 수구파 대신들은 군대를 통한 강제 해산을 건의하였습니다.

1898년 12월 23일, 격국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만민공동회 인원들을 포위하고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 해산을 단행하였습니다.

이틀후인 12월25일, 황제가 칙어로써 만민공동회의 11개 죄목을 열거하며 독립협회와 민민공동회를 공식적인 불법단체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시민드로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운동은 실패로 돌아고 말았습니다.

사진 : 대한제국 군대 사열장면

출처 :문화콘텐츠 닷컴

비록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을 지켜본 후배들에게는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일깨워준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ㅎ손들에게는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도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할 역량과 의지가 있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땅의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외세에 의동입된 것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선조들의 끊임 없는 열망과 외침을 통해 이룩된 것이었습니다.

사진:만민공동회

출처:네이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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