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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민주주의, 영조의 민의수렴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10-21

역사 속 민주주의, 영조의 민의수렴 "순문"

 

“현대 민주주의는 서구 역사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세계 최단시간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우리의 저력에는 우리 역사의 산물도 있지 않았을까? 왕권의 권위가 절대적인 조선왕조에도 절대권력을 견제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했던 제도와 문화를 살펴보면서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민주주의를 확인해본다.”


영화 <사도>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단종의 슬픔, 장희빈의 흥망과 더불어 사극 3종 세트(?)라 할 만큼 잘 알려진 사도세자의 비극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보고 또 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가 보다.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이 비극의 내막을 두고 이런저런 설과 주장들이 난무하거니와 비극의 두 축인 사도세자와 영조라는 인물을 두고도 각양각색의 해석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이 뒤주 사건을 빼놓더라도 영조는 매우 복잡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던 임금이다.


  

<영화 '사도' 스틸컷 / 출처 : (주)쇼박스> 

<영화 '사도' 스틸컷 / 출처 : (주)쇼박스>

 

우선 그는 조선 왕조 최장수 재위를 자랑한다. 무려 52년을 재위했고 여든세 살까지 살았다. 조선 왕조 임금 가운데 여든을 넘겼던 이는 태조 이성계와 영조뿐이었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트라우마와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오명에 시달렸던 그는 정통성 시비 때문에 격렬한 반란(이인좌의 난)에 시달리기도 했고 당파로 갈라진 신하들을 어르고 때로는 후려치면서 탕평책을 고수한 왕이면서 그 어느 왕보다 정력적으로 일했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잃지 않았던 왕이었다.

그가 신하들의 기를 죽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비단옷 칭칭 감고서도 콜록거리는 신하들에게 “과인은 지금까지 갖옷(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적이 없소. 내가 건강한 이유는 왕이 되기 전 사가(私家)에서 무명옷을 입고 채식하는데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오. (당신들은 도대체 왜 이리 허약하단 말인가 응?)”라고 염장을 지르는 것이다. 백성과 함께 살아 봤기에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영조는 그 경험과 긍지를 실질적인 개혁으로 연결시켰던 군주였다.


영조  

<조선 21대 왕 영조 / 출처 : SBS 프로그램 캡쳐>

 

조선 후기 백성들을 가장 괴롭힌 것 중의 하나는 군역(軍役)이었다. 영조 때 신하 홍계희가 “가장 낮고 힘없는 백성들만이 군역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아뢸 만큼 군역은 백성, 그중에서도 힘없고 배경 없는 백성들만의 천역(賤役)으로 전락해 있었다. 납속이다, 공명첩이다, 양반은 늘어나고 상민은 줄어들었지만, 군역은 상민만 지게 돼 있었고 그나마 인근 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연대 책임을 지우는 등 터무니없는 징세 사례가 많아 조선의 골칫거리가 돼 있었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양반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지우고 군역에 가지 않을 시 군역을 대신할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었으나, 양반 사대부들의 기득권은 철옹성과도 같았다. “어찌 사대부를 상민과 같이 대우한단 말입니까. 이 나라는 사대부의 나라요!”

이미 인조 효종 연간부터 군역에 대한 폐단은 심각했고 숙종 때 이사명(李師命)은 신분과 관계없이 호(戶)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자는 호포론(戶布論)을 주장했고 베 대신 돈으로 받자는 구전론(口錢論)도 제기되었다. 즉 양반에게도 세금을 매기자는 것이었으나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예는 세계사적으로 드물다. 호포론은 양반층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한다. 군역 개혁 논의는 영조 즉위 후 다시 한 번 불이 붙는다. 일반 백성의 삶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왕, 영조 역시 이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다. 

 

박문수 
<박문수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득권층의 저항은 여전히 자심했다. 암행어사로 이름 높은 박문수가 호조판서 시절 “양반, 상민 구별하지 말고 호별로 돈으로 납부하도록 하자.”는 호전론(戶錢論)을 폈을 때, 또 한 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어찌 양반이 군역으로 돈을 내든 베를 내든 한단 말인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신하들이 많았고 박문수는 나라를 망하게 할 놈으로 몰려 지방관으로 쫓겨 가고 말았다. 군역 문제로 고민하던 영조의 대응은 바로 ‘순문(詢問)’이었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제도였던 순문은 일반적으로 조정의 주요 관리를 대상으로 했다. 국가적인 재난이 있을 경우, 전국의 전현직 관리나 사족들을 대상으로 구언(求言)을 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순문은 실시된 적이 거의 없었다. 세종 때 토지 제도 개혁을 위해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 일종의 여론조사였다면 순문은 백성들에게 임금이 직접 묻고 의견을 듣고 정책 결정의 축으로 삼는 직접적 여론 청취의 장이었다. 영조는 바로 이 파격적인 순문을 가동하여 백성들 앞에 직접 나아간다. 군역 개혁이 좌초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순문을 기민하게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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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역에 대해 반대하는 양반들 / 출처 : SBS '비밀의 문' 캡쳐>

 

1750년 5월 19일 영조는 홍화문 앞에 나가 백성들에게 말한다. “이윤(伊尹, 중국 은나라의 전설상의 재상)이 이른바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내가(임금이) 밀쳐서 구렁에 떨어뜨린 것과 같다.’고 했는데, 바로 내 마음을 이른 말이다. 너희들에게 고질적인 폐단으로 양역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내 궐문까지 나와 묻게 된 것이다. 너희들의 소원을 듣겠다. 말하라.”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이 겪은 군역의 폐해를 토해 냈고, 이를 하나하나 새겨들은 임금은 이렇게 탄식한다.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하여 도탄에 빠져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조들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하며 눈물을 흘렸다. 백성들의 여망을 등에 얻은 지도자만큼 강력한 존재도 없다. 홍화문 앞에 나아가 백성들의 눈물 어린 호소를 듣고 자신도 눈물을 흘린 영조는 그로부터 두 달 후 ‘균역법’이라는 개혁 법안을 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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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원릉' / 출처 : 위키피디아>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필로 납부한다.” 양반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파격적인 조치(호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일단 백성들의 부담은 반으로 줄었다. 그에 따라 부족해지는 세수(稅收) 해결을 위해 우선 조선 후기 등장하기 시작한 재력 있는 평민들을 선무군관(選武軍官)으로 삼고 군포를 내게 하고 결작(結作)이라는 토지세를 지주들에게 부과하였으며, 왕실 소유였던 염세(鹽稅), 선세(船稅) 등도 일부 충당하도록 했다. 양반들에게 전면적으로 세금을 물리지 못한 (이는 대원군 때에야 실현된다) 한계는 있으나 백성의 뜻에 따라 백성의 이로움을 구한 ‘민의(民意)’의 구현이었다.

아들을 죽여야 했던 비운의 왕 영조는 정력적으로 백성을 위한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노력한 왕이기도 했다. 비록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겠으나 그가 사료의 군데군데 남긴 언동은 그가 단순한 봉건 군주가 아닌 애민의 군주, 그리고 백성의 뜻에 따라 나라를 움직여야 한다는 철칙을 지닌 왕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사료상으로 나타난 영조의 이상 국가, 즉 영조가 이루고 싶었던 나라는 ‘민국(民國)’이었다. 백성의 나라, 백성을 위하는 나라.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 자리에 있어도 하나의 독부(獨夫), 즉 보잘것없는 사내에 다름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미디어과>

 

정정당당스토리 

 

첨부파일 : movie_image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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