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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민주주의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6-01-20

 

역사 속 민주주의, 권력의 견제자 '사관'


“현대 민주주의는 서구 역사발전의 산물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세계 최단시간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우리의 저력에는 우리 역사의 산물도 있지 않았을까? 왕권의 권위가 절대적인 조선왕조에도 절대권력을 견제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했던 제도와 문화를 살펴보면서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민주주의를 확인해본다.”

 

 

<춘추전국시대 지도 / 출처 : zum학습백과>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 최저(崔?)라는 세력가가 살았다. 그가 국왕인 장공(莊公)을 죽이고 재상이 되자 사관(史官)이 붓을 들었다. "최저, 자신의 임금을 죽이다.“ 이것을 안 최저는 격노했다. 내가 역적이라고 대대손손 전하겠다는 거냐! 기세등등한 권력가 앞에 사관은 초라한 미관말직에 불과했다. 사관은 금세 끌려나가 목이 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는 사관이란 일종의 가업(家業)이었던 모양이다. 후임 사관은 죽은 사관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이 동생 역시 먹을 듬뿍 찍은 붓으로 선연하게 썼다. ”최저, 자신의 임금을 죽이다.“ 역시 최저는 펄펄 뛰었고 ”네놈이 형을 따르고 싶은 모양이로구나.”하고 죽여 버렸다. 그 후임은 사관 집안의 막내였다. 형 둘이 그리 속절없이 죽는 걸 봤으니 더 이상은 자신을 임금을 죽인 신하로 기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막내 역시 어김없이 “최저, 임금을 죽이다.”라고 썼다. 결국 최저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역사 그 자체는 결국 무덤 속의 티끌로, 비바람 맞은 유물 조각으로, 먼지가 내려앉은 유적으로 남을 따름이다. 그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역사가이고 과거로 따지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임무로 했던 사관(史官)들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제나라의 사관들처럼 역사를 왜곡하려는 무리에게 저항하고 필봉을 휘둘러 진실을 역사에 남겼다. 물론 권세에 아부하여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기록을 남긴 사관들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아는 사관들이었기에 역사 앞에서 겸손한 이들이 더 많았으리라 믿는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존재를 들자면 조선 시대의 사관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우리 기록 문화의 보배라 할 조선왕조실록은 바로 조선의 사관들이 쌓아올린 금자탑이었다.

 

 

 


<출처 : 문화유산채널 조선왕조실록 영상 일부>

 


조선 초기 임금과 가장 많은 갈등을 빚은 관료들 가운데 사관을 빼놓을 수 없다. 사극에 보면 임금과 신하들이 격론을 벌이는 와중에 사관이 묵묵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사관이 그런 자리에 등장한 것은 조선 2대 임금 정종 때부터였으나 역사를 기록하려는 그들의 본능적인 움직임은 창피한 일은 덮고 참담한 일은 빼려는 권력자와 끈질긴 갈등의 역사를 창조한다.

 


사관들과 가장 앙숙이었던 왕은 역시 태종 이방원이었다. 함경도 변방 출신 무장의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이성계의 체면을 살려줬던 태종이지만 그에게도 무인의 피가 흘렀던지 사냥을 너무도 좋아했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태종은 사냥을 즐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무인가의 후손’이 말에서 떨어지다니 태종에겐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면서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사관의 존재였다. 마침 사관이 보이지 않았다. 태종은 찡그린 얼굴로 한마디 했다. “사관이 모르게 해라.” 그러나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임금이 신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냥을 나간 것은 기본, 말에서 떨어지는 망신을 당한 것은 물론,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해라.”고 주위에 쉬쉬한 사실까지도 낱낱이 기록된 것이다. 궁 안에서 격구 경기가 벌어져 떠들썩하자 임금이 사관에게 물었다. ”격구를 했다 뭐 그런 것도 쓰느냐?“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임금의 거동을 모두 기록하는데 하물며 격구를 빼놓겠습니까.”

 

 친히 활과 화살을 가리고 말을 달리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 - 태종실록 4년 2월 8일 


<출처 : 문화유산채널 조선왕조실록 영상 일부>

 


사관은 권력의 가장 귀찮은 감시자였다. 역사의 무서움을 끊임없이 전하여 권력자의 행동을 바로잡고 또 권력자의 일탈을 유감없이 기록하여 후세에 울리는 경종으로 남긴다. 바로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기록될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아직 조선 왕조를 개창하기 전 고려의 왕을 자임하던 시절 이성계는 사관 이행이 쓴 기록을 보게 된다. “이성계가 죄도 없는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라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조준이 먼저 이 기록을 보고 기절초풍을 하여 이성계에게 보여 준 것이었다. 이성계는 노발대발한다.

 


“우(禑)와 창(昌)은 백관(百官)과 나라 사람들이 입을 모아 목 베기를 청하므로, 공양왕이 이를 윤허한 것이고 나는 처음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는데 이 보이지도 않는 선비가 어찌 이 지경으로 말을 한단 말이냐.”

 


임금을 죽인 고대 중국 제나라의 최저가 되기 싫은 이성계의 몸부림이었다. 그는 사초를 갖다 바치라고 호령한다. 이때 가로막고 나선 것이 사관 신개였다. “후대의 본이 되셔야 할 창업군주가 당대의 역사를 열람하시면 후대 군왕들이 이를 구실삼아 사초를 보고 뜯어고치는 일이 흔하게 될 겁니다. 어느 사관이 무슨 역사를 기록하겠습니까.”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기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출처 : 문화유산채널 조선왕조실록 영상 일부>

 


사관은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비판자였고 평가자였다. 임금의 행적을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흠결이나 정책의 실수, 국정의 운영 방식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제아무리 세력이 드높던 세도가들이라도 역사가의 붓 아래에서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가며 아첨하는 무리’로 깔아뭉개지기 십상이었다. 이는 곧 우리 역사가 자랑할 만한 민주주의적 전통이었다. ”기쁨과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고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임명하니 환관들이 임금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두려워하지 않았다.”(조선 명종에 대한 기록)면서 임금의 성격적 결함을 폭로하고 “결단성이 부족하여 일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룬 것은 없었다. 맺고 끊지 못하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평안을 이루지 못했다.”(조선 중종에 대한 기록)고 가혹하게 깎아내릴 수 있는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완비한 나라가 그 시대 어디에 또 있었던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 곳곳에서 사관들의 생생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묵묵히 붓을 놀리면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던, ‘사관은 논한다!’라며 자신에게 봉건 왕조가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구사하여 임금부터 권세 있는 신하와 당파의 우두머리들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던 기개 있는 이들의 씨근거림이 그야말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어떤 절대 권력도 함부로 해할 수 없도록 제도가 보장한 자유. 그 첨병이자 선봉으로 조선 사관이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미디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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