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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선거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10-20

작은 들꽃, 구절초를 들여다보는 시간 / 구절초의 계절

 

 

시어머니는 국화를 좋아하셨다. 남편은 때마다 꽃집에 들러 국화를 사다 드렸지만, 어머님은 소녀 같은 탄성 끝에 꼭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실은 이렇게 서양에서 개량해 역수입된 국화가 아니라 산천에 피는 들국화가 내 취향이야.”

 

 

작은 들꽃, 구절초를 들여다보는 시간 

 

 

한번은 시댁 뒷산에 자주 오르시던 어머님을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그 날 산책을 하며 어머님은 따분하게 시댁의 가풍을 읊어주는 대신 국화의 종류를 일일이 알려주셨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줄기 끝마다 꽃이 피어서 무리 지어 보이는 연보라 꽃은 쑥부쟁이, 잎이 길고 가늘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는 꽃은 벌개미취, 꽃 모양은 쑥부쟁이와 비슷하지만 잎이 쑥을 닮은 것은 구절초라고 하셨다. 설명을 들어도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보고, 모르긴 해도 어머님은 이렇게 생각하셨지 싶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나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이 시를 쓴 시인은 ‘무식한 놈’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오히려 ‘무심한 놈’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니까, 문제라면 들국화의 종류를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전화기조차도 알아야 쓸 수 있는 요즘 같은 첨단 시대에, 우리는 제 부모, 제 자식 얼굴 보고 살기도 바쁘다. 게다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식물의 반 이상이 국화과라는데, 벌개미취의 영어 이름이 ‘코리안 데이지(Korean Daisy)’라는 사실을, 쑥을 캐러 간 불쟁이(대장장이)의 딸이 죽은 자리에 피어났다는 전설을 가진 쑥부쟁이가 그래서 비스듬히 자란다는 사실을, 음력 9월 9일에 잘라야 약효가 좋다고 해서 구절초라 불린다는 걸 모른다는 게 무슨 대수인가.

 


여기에 산에 피는 몽글몽글 귀여운 국화인 산국, 비슷하게 생겼지만 꽃잎에서 단맛이 나는 국화인 단국, 울릉도의 울릉국화, 한라산에만 자라는 한라구절초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식물도감이나 뒤져봐야 알 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작은 들꽃, 구절초를 들여다보는 시간 

 

 

어쨌든 그 수많은 종류의 국화 중에서도 어머님은 가장 볼품없는 흰색 구절초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는 종종 “구절초가 피니 가을이구나.”, “구절초가 지니 겨울이구나.”라는 선문답 같은 문자로 바쁘고도 무심한 며느리의 계절감각을 일깨워주셨다. 이 문자는 곧 짬을 내어 공주 영평사에 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구절초 축제가 열린다. (10월 초부터는 정읍에서 구절초축제가 또 열린다.) 어느 스님이 버려진 작은 절을 사 주변에 구절초를 열심히 심기 시작한 지 십수 년 만에, 그곳은 가을이 되면 온 언덕이 눈처럼 새하얀 구절초로 뒤덮이는 명소가 되었다. 구절초만큼 국수 공양으로도 유명한데, 항아리 위에 국수와 열무김치를 놓고 서서 먹는 그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그릇에 코를 박고 먹다 보니 항아리 아래 소담스레 핀 구절초에 눈이 갔다. 눈물 나게 수수한 모습 때문인지, 은은하게 퍼지던 알싸한 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구절초에 관한 옛이야기 때문인지, 하여간 국수의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머니들이 가을이 되면 들녘에 피는 구절초를 보면서 시집간 딸을 그리워했다고 구전되어온 이야기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역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좋은 시절에 태어난 덕분에 나야 구절초를 반찬 삼아 국수 한 그릇 맛있게 먹으면 될 일이었지만, 실제 옛사람들에게 구절초는 일상에서 매우 요긴하게 쓰인 꽃이었다. 길 가던 가난한 선비는 시골 길 산비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구절초를 꺾어 말려 책갈피로 사용하기도 했고 베개에 넣어두기도 했다고 한다. 본래 구절초에는 세균을 억제하는 물질이 들어있어 책에 좀이 슬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산뜻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하고 집중력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구절초는 약차와 약술의 재료로 자주 사용된다. 상처가 났을 때에는 구절초 잎을 빻아 붙여주면 되었고, 아낙들은 오래 두고 먹어야 하는 귀한 떡 위에 구절초 잎을 얹어 두었으며, 몸이 약한 여성들은 때마다 말린 구절초를 달여 약으로 먹었다. 중국 전설에 이르길 구절초 꽃잎 위의 이슬은 생명을 연장하는 음료라 했을 정도다.

 

작은 들꽃, 구절초를 들여다보는 시간 

 

 

가을을 수놓은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도, 그 자리에 구절초는 꿋꿋하게 피어 있을 것이다. 구절초는 들국화 중에서도 가장 늦게 피는 축에 속한다. 사실 국화 자체가 다른 모든 꽃보다는 늦게 핀다. 예로부터 사군자(매난국죽) 중 하나인 국화를 두고 ‘경쟁에 목매지 않는 군자’라 칭송한 이유이기도 하다. 백일홍이 자그마치 백일 동안 현란한 붉은 빛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면, 국화는 찬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 때에도 고아한 색으로 사람들을 위로했다. ‘화무십일홍’, 즉 열흘 붉은 꽃 없다는 고사성어에서 꽃은 늘 화려한 한 시절을 일컫는 대상으로 통용되었지만, 국화는 여기에서 빼도 좋을 것 같다. 보통의 꽃들이 앞다투어 피는 계절이 아닌, 가을 무렵 서리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제 존재를 다하는 이 꽃의 짧은 한 철을 인간의 어리석은 권력욕에 빗댈 수는 없다. 게다가 그것이 양반집 병풍에도, 우아한 시에도 등장하지 못한 채 그저 산천에, 길가에, 언덕에 핀 들국화 구절초라면 더욱 억울하다.

 


올해는 하필 추석이 9월 말이라 영평사에는 가보지 못할 것 같다. 대신 빠르고 무심한 걸음으로 걷는 대신 천천히, 찬찬히 길모퉁이를 살펴볼 생각이다. 구절초의 향은 소박하지만 고결하여, 예로부터 정성스럽게 풀 먹여 다림질한 옷을 입은 덕망 있는 선비를 은유했다는 설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구절초의 꽃말인 ‘순수’의 의미를 상기하기에 매우 적당하다. 그리고 목적지에 이르는 것보다 그 과정이 더 소중하다는 진실은, 그리고 그것이 산책길에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심지어 정치에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 송이 들국화가 깨우쳐줄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 들꽃, 구절초를 들여다보는 시간 

 

 

누군가의 삶에 기꺼이 함께하고,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여, 그들의 삶을 도운 이 작은 들꽃의 사명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일이며 흔히 ‘정치’라 일컫는 행위의 정수가 아닐까. 무엇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 꽃이나 인간이나, 사랑이나 정치나,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더는 정치에 무심하지 말자. 마음을 쏟는 만큼 정치는 이로워질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도, 그들이 함께 만드는 정치도 구절초를 닮았으니, 이 들꽃의 정취가 더욱 기대되는 가을이다.

 

글/ 윤혜정(<바자> 피처디렉터)

 


*위 내용은 외부 필진의 개인적 의견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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