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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니어도 괜찮다, 민주적 지도자의 모범 킨키나투스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9-06-03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오른 사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페르시아를 대제국으로 만들었고 정복자에게 관대한 왕으로 이름 높았던 키루스 2세는 원정 중 전사하고 그 아들 캄비세스가 왕위에 오른다.

 

캄비세스는 이집트 정복에 성공했으나 과욕을 부려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까지 쳐들어갔다가 곤경에 처했고 내부의 반란 소식에 급거 귀국하다가 사고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는다. 내부의 반란자는 캄비세스의 동생을 참칭했으나 사실은 사기꾼이었다. 이에 다리우스 등 페르시아 귀족들이 연합하여 찬탈자를 응징하게 된다.

 

 

 

나 아니어도 괜찮다, 민주적 지도자의 모범 킨키나투스 관련이미지1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에 어떤 정치 체제를 둘 것인가를 두고 다리우스를 포함한 일곱 동지들이 일대 논쟁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타네스라는 이는 군주독재체제가 이런 불행한 사태를 가져왔다며, (그리스 같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한편 다리우스는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주도권을 갖는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전제 군주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군주가 능력이 출중할 경우 한 군주는 한 나라를 너끈히 바꿀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이가 권력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그만큼 효율적일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타네스가 얘기하듯 군주가 그 역할을 못하게 될 경우 군주와 백성 모두 불행해진다. 한편 민주정치의 경우 다리우스가 간파했듯 국민들이 주인의식을 발휘하지 못하고 욕망과 군중 심리에 휩쓸릴 경우 중우정치(衆愚政治)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결국 페르시아가 선택한 것은 군주독재 체제였다.


2500년 전의 논쟁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우리에게 이 논쟁은 너무나 낯익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 방식 때문에 장기 집권 내지 종신 집권을 획책하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통치자가 우리 현대사에도 버젓하지 않은가. 또한 민도(民度)가 어떠니 국민들의 수준이 어떠하니 하는 판에 박힌 소리들도 한 두 번 들어 본 게 아니지 않은가.


사실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권력자를 선택하고 물러서게 할 수 있는 권리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다. 동시에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00가 다 해 주실 거야.” 하는 권력자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과 권력자 본인의 극단적인 권력 의지였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른 의견들을 압살해 버리는 권력 의지 말이다.

 

 

 

 

나 아니어도 괜찮다, 민주적 지도자의 모범 킨키나투스 관련이미지2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키나투스(Lucius Quinctius Cincinnatus, B.C 519-430)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다리우스와 거의 비슷한 시대, 충분히 절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또 감히 그에 반대할 사람도 없었는데도 자진하여 그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 주었던 한 로마인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름하여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키나투스(Lucius Quinctius Cincinnatus, B.C 519-430)


원래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였는데 그의 곱슬머리로 인해 킨키나투스(곱슬머리)라는 별명으로 주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가문은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이었고 그 역시 로마의 집정관을 역임했다. 임기 1년의 집정관을 별 탈 없이 마쳤지만 그는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들 카이소는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성격이 불 같았고 혈기가 왕성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스타일이었다. 어느 날 귀족의 일원으로 권리 주장을 높이던 평민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카이소는 평민 하나와 다툼을 벌였고 급기야 평민을 살해하고 말았다.

 

평민들을 대변하는 호민관은 이를 몰아붙였다. “반드시 저놈을 죽이고 말겠다.” (이 살인 사건이 평민측의 무고(誣告)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살인죄에 따른 사형이 유력해지자 킨키나투스는 아들을 외국으로 망명시킨다.

 

대신 킨키나투스는 전 재산을 털어 아들의 보석금을 내야 했다. 빈털터리가 된 전직 집정관 킨키나투스는 태연하게 로마 변두리의 오두막으로 들어가 손바닥만한 땅을 경작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중 B.C 458년 로마에 큰 변고가 일어난다. 아위퀴 족과 사비니 족이 로마를 노리고 쳐들어왔고 집정관 미누키우스의 군대가 이를 맞아 싸웠으나 되레 계략에 빠져 포위돼 버린 것이다.

 

포위망을 가까스로 탈출한 기병들이 갈라진 목소리로 전황을 얘기했을 때 로마는 거대한 충격에 빠진다. “비상 상황이다.” 비상한 상황이면 비상한 수단을 써야 했다. 본디 로마는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 상호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의사 결정이 늦어지거나 귀족, 평민으로 갈라져 의견이 충돌할 경우 집정관끼리도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이 단점을 극복하고자 국가 위기시 1명을 최고 지도자로 뽑되 임기를 6개월로 제한하는 딕타토르(Dictator) 즉 독재관 제도가 운용됐는데 이번 위기에서 원로원과 집정관이 선택한 이가 바로 곱슬머리 킨키나투스였다.


원로원 의원들이 킨키나투스를 찾았을 때 그는 밭을 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태평하게 묻는 킨키나투스에게 원로원 의원들은 독재관 임명을 전하고 그의 명령에 따를 것을 맹세한다.

 

킨키나투스는 아내를 부른다. “그럼 올해는 밭에 씨를 뿌릴 수 없겠구료. 식량이 모자라 먹고 살기 힘들겠군. 부디 이곳을 부탁하오.” 이후 킨키나투스의 행동은 전광석화 같았다.

 

로마로 복귀한 그는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군복무를 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은 전원 5일치의 식량과 12개의 말뚝을 준비하여 집결하라.” 그리고는 아군을 포위하고 있는 아위키 군에게 접근, 말뚝을 박아 진영을 만들고 함성을 지른다. 포위된 로마군은 용기를 내 반격을 개시했고 아위키군은 되레 포위돼 앞과 뒤에서 로마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아위키군은 항복을 청했는데 킨키나투스는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굴욕적인 조건을 내건다. 창 두 개를 꽂고 그 사이에 낮게 창을 걸어놓은 일종의 멍에(jugum) 밑으로 (sub) 기어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 굴욕적인 조건이 오늘날의 영어 단어 subjugate (예속시키다, 통제 하에 두다)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다.


킨키나투스는 보름도 못돼 로마의 위기를 극복하고 적군을 격퇴한다. 임기는 5개월하고도 열흘이 넘도록 남아 있었다. 그러나 킨키나투스는 과감하게 독재관직을 내던지고 자신의 밭으로 돌아갔다. 그가 더 권력을 유지한다고 해서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밭으로 돌아갔다. 20년 뒤 반란이 일어나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킨키나투스는 또 한 번 바람같이 돌아와 독재관이 돼 반란군을 무찌른 후 독재관 직을 내놓고서 자신의 밭으로 복귀한다. 두 번씩이나 절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두고 이것은 로마에서 가난이 명예롭게 여겨지고, 킨키나투스와 같은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4 유게라의 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로마사 논고)고 표현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는 1인 독재 권력의 유혹을 물리쳤던 킨키나투스의 명예로움은 시대를 넘어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이 킨키나투스를 멋지게 본받았던 위인이 바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그는 킨키나투스를 존경했고 ‘킨키나투스 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나 아니어도 괜찮다, 민주적 지도자의 모범 킨키나투스 관련이미지3
조지 워싱턴 / 사진 출처. 위키백과

 


조지 워싱턴 역시 두 번의 절대 권력 기회가 있었다.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와 재선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였다. 독립 전쟁 후 워싱턴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워싱턴은 이를 마다하고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다시 국민의 부름을 받아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으로 재선을 마쳤을 때 그는 3선을 거부하고 국민의 일원으로 돌아간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 자체가 낯설었던 시기였고 워싱턴 스스로도 궁중 언어를 구사할 만큼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한다거나) 군주제에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1인 독재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단호했다. 그리고 역사 앞에 겸손했다. 그의 고별사 중 일부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많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실수가 무엇이었든 창조주께서 그 악영향을 줄여 주시고 내 나라가 이를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원합니다. 나라를 위해 살아온 45년 동안 나의 무능함으로 생겨난 흠집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길 바랍니다.”


이 겸손함,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욕심과 “국민이 나를 원한다”는 착각과 “내가 정의다.”라는 오만에서 벗어난 겸손함은 민주주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 중의 으뜸에 속할 것이다. 2500년전의 킨키나투스와 240 여 년 전의 조지 워싱턴은 그런 미덕의 소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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